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항저우 만 상륙작전 == 한편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10월 20일 또 병력 지원을 승인했다. 화북의 6사단, 본토의 18사단, 114사단, 야전 중포병 6연대, 독립 산포병 2연대, 예비 보병 2개 연대 8만명이 모여 10군을 편성했다. 2.26사건으로 예편했던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이 복귀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한편 일본군은 상하이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방어선이 미약한 항저우를 치기로 결정했다. 화북 전선의 16사단이 차출되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중국군을 모조리 포위섬멸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 상륙한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중지나방면군을 편성했고 사령관으로 마쓰이 대장을 임명했다.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이 진산웨이에 상륙했다. 그들은 일본군 백만 항저우 만 상륙이란 애드벌룬까지 크게 띄우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했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일찍이 [[바이충시]]가 상하이를 포기하고 젝트 라인으로 철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바가 있으나 장제스는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중국군은 항저우만의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11월 8일 67군의 군장 우커런 중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렸다. 장제스는 11월 8일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리고 푸산-쑤저우-자싱을 잇는 우푸 방어선을 설정했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밀집된 중국군은 제대로 된 철수계획도 없이 걸어서 탈출해야 했는데 일본군 항공기들이 폭격을 가하고 일본군이 접근한단 소식에 사실상 와해되어버렸다. 당연히 일본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다.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했다.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